모든 창조적인 디자인 방법론은 결국 지난 글에서 말한 '연역하기(deducing)'로 수렴된다. 모든 사람들이 연역적 디자인을 하게 된다면 미래에는 디자이너라는 소수 지식권력층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손쉽게 디자이너가 되기 때문이다. 현재에는 디자이너가 되려면 이태리, 파리 유학이나 전공, 경력 등의 진입 장벽이 존재한다.

대신, 디자인 테크닉이 하나의 방법론으로 통일되면 그때부터 디자인은 철학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디자인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이므로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을 창조할 수 있는 모체(연역의 시작점)가 무엇인가에 대해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일단 모체만 설정되면 구체적인 형상으로 구현하는 것은 쉽게 해결되는 테크닉의 문제이다. 하나의 모체에서 각자의 개성에 따라 수백가지의 디자인이 나올 수 있다.

결국 '아름다움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필요해진다. 아름다움이 뭔지 알아야 그것을 창조할 모체를 설정할 것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디자인이 철학이 된다는 것임).

내 경우 디자인을 시작할 때 '아름다움'은 보편적이라는 대전제를 두었다. 아름다움은 시대와 인종과 성별을 초월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름다움은 보편적 진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보편적 진리가 인간을 향해 말하고, 또 인간을 부르는 작용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진리의 유혹'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자연과 우주의 모든 섭리(혹은 진리)에서 연역된 디자인이 바로 우리가 보는 모든 자연물들이다. 냇가의 조약돌, 바람에 휘날리는 꽃잎, 곡선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새 등등... 위대한 디자이너는 진리에서 직접 연역하여 구체적인 형상을 구현할 것이다. 그러나 조물주 이외에 그런 디자이너의 작품을 아직까지 본적은 없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방법은 진리의 구현인 '자연물'을 다시 연역의 모체로 삼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물을 모체로 실험적으로 탄생한 첫 작품이 아바로키테슈바라이다.

내 전제가 맞다면, 모든 인간은 이 작품에 대해 아름답다라는 평가를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진리가 디자인한 '꽃'의 아름다움조차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로 자기 일에 쫒기는 직장인 남성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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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바로키테슈바라(위 사진)를 아름답다고 할 사람들은 1) 어린이, 2) 여성, 3) 순수를 잃지 않은 남성 정도의 순서일 것이다. 지난 6개월간 주변의 반응을 구체적인 수치로 분석해보지는 않았지만, 1)번의 확실한 지지는 있는 것 같다. 메카닉이라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2)번이 꽤 있으며, 3)번이 생각보다 의외로 많았던 것 같다. 대략 1) 3) 2) 정도...

아름다움을 재현해보려는 내 시도는 어느정도 성공한 것 같다. 물론 아직 한계도 많이 있다.

이제 아바로키테슈바라가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과정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미 말했던 대로 모체는 자연물이다. 인간은 진리가 연역된 자연물과 접하는 순간 마음속에서 강한 끌림이 일어나게 된다. 인식이 있건 없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이다.

먼저 아바로키테슈바라의 머리 양 쪽의 장식은 높이 비상하려는 두 마리 새의 형상을 따왔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긴장감을 주기위해 머리와 꼬리를 살짝 뒤로 젖혀주어 주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몰라도 사람들은 여기에서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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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했고,,,

다음, 가슴은 전진하고자 하는 들짐승의 얼굴을 모체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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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의 장식은 꼬리를 높게 치들고 앉아 인간을 내래보는 뱀의 머리를 한 새의 형상이다. 이 모체가 무엇인지 알던 모르던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긴장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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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의 장식과 장갑 역시 날개를 퍼덕이려는 새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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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의 경우 이부분이 남성의 성기로 되어있다. 얼핏보면 기저귀를 찬 것처럼 보이지만, 의도는 남성의 성기 디자인이다. 아바로키테슈바라의 경우 건담처럼 마초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무릎은 학의 모습이다. 특히 무릎을 굽힐 경우 학이 양 날개를 펼치며 살포시 내려앉는 모습으로 디자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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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팔의 경우는 물결을 따라 헤엄치는 암수 두 마리의 물고기이다. 몸은 둘이나 입은 하나이고, 그 입에서 손을 토해 낸다. 상박의 무늬는 추진시에 일어나는 물결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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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연물의 동적인 움직임을 모체로 했기 때문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긴장감이 유발된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런 디자인의 원리를 모르더라도 보는 순간 직관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성적인 사고 작용으로 내리는 결론이 아니라 직관적인 소통이다. 특히 편견과 선입견이 없는 순수한 사람들이 더 강하게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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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직관적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UCC영화를 직관영상이라는 틀에서 만들어 보려고 했다. 대사, 설명 등등 없이 직관적 이미지를 극대화한 프레임들을 결합하는 방식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계속 실험중이기 때문에 먼 훗날에 설명하고자 한다.

직관소통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 아바로키테슈바라에 대한 평가는 최초 보는 순간 부터 0.4초 이내에 감성적으로 모두 끝나게 된다. 그 이후에는 보는 이의 이성적인 편견이 작용하게 된다. 그가 지금껏 봐왔던 다른 디자인과 비교해보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재정리해서 결론을 내리고 기존의 저장 카테고리에 맞춰 억지로 끼워 넣으려고 한다. 지난 번 글 '아바로키테슈바라의 눈'에서도 얘기했지만, 인간의 두뇌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지 않고, 어떻게든 기존의 지식에 맞춰 인위적으로 재가공해서 저장한다.

어른들이라면 0.4 초 이후 부터 재가공해서 두뇌의 저장 폴더에 끼워놓고 자신만의 편견의 눈을 가지고 기억하게 된다. 바빠서 그런데 관심없는 사람들, 아니면 너무 관심이 많아서 건담 등 기존 메카닉에 대해 좀 안다고 떠드는 사람들(나는 이들을 '건담 오염자'라고 부른다)이 특히 그러하다. 결국 이들의 직관적인 초기 반응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도적으로 기억에서 삭제된다. 두뇌의 일관성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아이들이나 편견이 없는 사람들은 최초의 여운을 인위적으로 재가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한 동안 즐기게 된다. 굳이 이것이 무엇인지 분석하거나 정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마음을 자연스럽게 열어 두고, 속에서 일어나는 끌림을 한 껏 불러 일으킨다. 그들과 나는 진정 아름다움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Posted by Andy Kim